(2003. 11. 23. 모 게임 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린 글) 제가 생각하는 니나라는 캐릭터.. 그 전에 83에 대하여.
설정 파괴니, 사기니 하는 이야기도 많습니다만, 작품 외적인 이야기는 접어두고 작품만을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간 관계에 대해서만요. 우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저 또한 83에서 버닝 대위와 시냅스 함장과 함께 좋아하는 캐릭터인 아나벨 가토. 어떻게 보면 핵 한방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전함을 날려버린 희대의 살인마로도 보여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가토가 핵을 날린 관함식이 있던 콘페이도... 솔로몬은, 자신의 별명이 만들어지기도 한, 가토라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조국과 이상이라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을 던져 싸워온 사람..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은 용사라고 하지요. 환타지 세계의 로맨틱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비유입니다만, 한국전쟁이 끝난 지금도 비전향 장기수로 살고 계시는 많은 분들은 자신의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시면서도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위해서 지금도 전쟁중이신 분들이십니다. 아나벨 가토라는 캐릭터는, 비단 빔샤벨을 멋지게 휘두르고 폼잡고 핵을 날리는 장면을 보여주고, 오오츠카 아키오라는 매력적인 성우가 연기했기 때문에 영웅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상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들이 적은 까닭에 영웅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운이 다해 전장에서 쓸쓸히 산화해 가는 것도 보는이에게 눈물 짓게 하는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비운의 영웅을 오래 기억하고 추앙하게 되는 법이지요. (이것은 어찌 보면 다분히 일본적인 느낌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코우가 싫은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처음에는 약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강해지면서 자아를 확립해가는 역할을 수행하는 캐릭터를 우리는 주인공이라고 부릅니다. 그저 건담이 좋아서 군에 입대한 철부지 사관생도가 어쩌다가 건담 시작 1호기를 타고 과거 전쟁의 잔당을 쫓아갑니다. 그 장면은 사명감이나 운명이라기 보다는 치기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죠. 그 뒤에도 계속 건담을 타게 되는 건 버닝 대위가 운이 없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그는 계속해서 건담에 타게 됩니다.. 주인공으로써 말이죠. 그렇지만 그가 싸우는 이유는, 가토가 보여주는 이상, 국가나 사상이 던져주는 사명감에 운명을 걸고 싸워나가는 그런 이상이 아닌, 니나라는 여자에 대한 연심과 가토라는 강한 적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점철되어 보인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아니라고 보시는 분들도 많을지 모르지만요) 각성제를 맞아가며 출격하는 장면은 열혈물에서 하나의 미덕이 될 지 모르고, 제가 볼때는 안스러워 보일 만치 추한 '오기'였습니다. 그 시점에서 알비온 대에 파일럿이, 건담을 몰고 나갈만한 파일럿이 과연 코우밖에 없었는지, 1년전쟁을 헤쳐나온 고참들이 있는데 굳이 코우여야만 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지요. 물론 그런 집착에 가까운 오기를 보여주었기에 끈질기게 가토를 추격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만큼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요. 어쨌든 여러모로 동감을 얻을 수 없었던 83의 주인공인 코우 우라키는 제게는 좋아할 수가 전혀 없었던 캐릭터였습니다. 그에 대비되는 가토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일 뿐이었달까요.
그리고 그 사이에 놓여진 니나라는 여성..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런 행동이 납득이 안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납득이 간다고 해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만약 2차로 발사된 솔라레이(바스크 옴의 화풀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만..)에 덴드로비움이 완파되었다면..(가능성은 충분히 높습니다.) 니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가토가 살아남았더라면? 액시즈 함대에서 그녀를 알비온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마지막의 니나의 미소는 가토를 향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방향을 알 수 없는 여심이란 그런 겁니다. 그렇기에 이야기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겠습니다만... 지금 사랑하는 남자가 있지만 과거에 사랑했던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둘 다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전장에서, 가토가 쏜 핵보다도 더 위험한 지경에 이를 지 모르는 콜로니 낙하 궤도 수정 현장에서 인류에게 벌어질 대 학살의 피해를 줄이는 것 보다 옛 연인을 구해야 겠다는 그 위험천만한 발상은, 물론 연심의 행방이야 아무도 모르는 것이겠지만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로써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밖에는 보이지가 않더군요. 이렇게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토가 궤도 수정을 하고 있을때 니나도 총을 들었다... 그렇지만 그 총성은 코우의 것이었죠. 다음 순간 바로 니나의 총구는 코우를 향했죠. 복부에서 출혈을 보이는 가토를 부축하고 코우를 위협하면서 탈출하는 니나의 모습은... 참 불쌍한 여자라는 공감이 일기 전에, 맘에 안드는 주인공이었지만 코우에게 연민을 일으키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니나의 행동.. 납득은 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니나 퍼플튼은 결국,건담 3대 밥맛이라는 (요즘은 좀 더 늘어난 듯..) 오명을 뒤집어쓰기에 필요충분한 캐릭터였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레빌 장군 이후 연방의 양심이었던 코웬 중장과, 에이퍼 시냅스 함장, 버닝 대위 같은 멋진 사나이들이 출연하고 있었기에 코우는 더욱 밥맛으로 보여졌고, 시대착오적인 사무라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이상을 위해 온몸을 내던진 아나벨 가토라는 사무라이의 쓸쓸한 최후가 있었기에 83은 우주세기 건담의 명작 반열에 올라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