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서. 조금 긴데, 이럴때 히흘후처럼 줄일 수 잇는 기능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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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큰해지려는 콧날에 상념에서 깨어난다. 팔짱을 낀 채로 내려다 보던 거리는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거리에춤추는 불빛들이 너무나 환해서 축복받은 밤의 기운이 유리창 너머 혼자인 나를 비추어 주고 있다. 팔짱을 풀고, 양 손바닥을 마주대고 가볍게 비벼본다. 손을 비비는 소리와 그 따스한 마찰은 아무런 의미없는 행동이지만, 이제 많지 않은 잔업에 다가가야 한다는 마음의 준비는 된다.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로 돌아가 키보드에 손을 얹지만, 상념은 완전히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키보드 위를 까딱거리는 두 손은 메모지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제는 잡을 수 없는 그녀의 손을 떠올린다. 언제까지나 잡고서 걸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 작고 차가왔던 손을. 늘 손이 차가와서 내가 손으로 잡고 가끔은 내 옷 속에 넣어서 따스하게 해주었던 그 손... 그 손을 잡고 있을 때에는 언제나 세상 모든 것들이 반짝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그 손을 잡고, 서로의 슬픔도 기쁨도 모두 이해하며 함께 꿈을 따라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외톨이가 되어 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빛바랜 오늘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그날의 상념은, 나를 쉽사리 일로 돌려보내주지 않는다. 나는 그저 누르지 못하는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만을 까딱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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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동네의 썰렁한 역까지도 성탄전야의 분위기에 들썩이고 있고, 나는 거리에 흘러나오는 젊은 가수의 캐롤송을 따라 부르며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녀의 오빠와 자취를 하고 있지만, 오늘 그녀의 오빠는 연인과 성탄전야를 성스럽게 보내기 위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은 단둘이서 우리 나름대로 성스러운 밤을 보낼 계획을 세웠고, 예정보다 늦어져 미안하긴 했지만 그녀의 집에 가까워지는 길가에서 흘러나오는 내 콧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선물을 끌어안고 잰 걸음으로 그녀의 집에 도착해, 조용히 키패드를 눌러 그녀의 집 문을 열었다. 빼꼼 들여다 본 집 안에서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팬케이크와 스파게티 정도의 가벼운 메뉴였지만 그것은 그녀 나름대로 특기인 요리들이었고 또 나는 그녀의 팬케이크를 좋아했다. 조용히 들어가 선물을 문간에 살그머니 내려놓고,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식탁에 올려놓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고생했다.. 추웠지? 오빠네 팀장 진짜 성격 특이하다. 오늘 같은 날.][괜찮아. 그래도 빨리 끝냈지 뭐. 그보다 이거.] 가방을 내려놓고, 옆에 내려놓았던 의자를 자랑스럽게 들어올렸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선물에 조금 놀라고, 포장을 뜯고는 내용물에 더 놀란다. 그 놀라는 얼굴 표정 속에서 정말로 기뻐하는 눈매와 입술을 보았고 나도 모르게 나는 그녀을 끌어 안았다. 그녀는 손에 포장을 막 뜯은 의자를 들고 나에게 안겼고, 나는 의자와 그녀를 함께 안고서 잠시 그대로 있다가 곧 함께 저녁상을 마저 차렸다. 웃으며 그 겨울 가장 맛있었던 저녁을 먹고, 캐롤을 들으며 함께 설거지를 하고, 문을 꼭 잠그고, 촛불을 켜고, 함께 샤워를 했다... 살갗이 드러난 그녀의 등에 한 손을 두르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침대에 누워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 등뒤에서 빛나고 있는 촛불은 어두운 방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고, 그 불빛에 물든 그녀의 얼굴은 조금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결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 생김이지만, 나는 그녀의 웃는 얼굴과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표정이 좋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얼굴은 세상에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고, 그 표정은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었다. [너희 오빠한테 감사해야겠다. 오늘 외박해줘서 고맙다고..][지금쯤 우리는 상대도 안되게 야하게 하고 있을걸 뭐.] 그녀의 오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와 그녀의 집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그녀의 부모님은 나를 우울하게 한다. 문득, 지금 이 순간의 커다란 행복과는 다른 어떤 두려움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 언젠가는 이 사람이 내게서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만약 지금 그녀가 내게서 사라진다면... 그런 무서운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상상도 되지 않았고, 지금 내 품에 안겨있는 그녀를 놓쳐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생각 때문이었는지 그녀의 등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조금 표정을 찡그렸지만 그 표정까지도 너무나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자, 내 못난 얼굴 뒤로 방을 물들이고 있는 촛불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촛불의 안쪽에 숨어있을 그녀의 진심에 닿기를 바라며 나지막히 말했다. [우린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거야. 절대로. 우린 지금처럼 쭉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응.. 꼭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이며 대꾸해 주었다. 그 작은 목소리를 듣자,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가슴 한쪽이 따뜻해져 오면서도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떠올라,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작은 흐느낌이 되었고, 그녀는 내 알 수 없는 마음을 다독거려 주려는 듯 작은 손으로 나를 끌어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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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정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던 그녀는 아무런 이유도 핑계도 대지 않고 메일로 이별을 통보해 왔다. 전화를 해 보았지만 받지 않았고, 문자 메세지도, 연차를 내고 찾아간 그녀의 짚 앞도 내게 그녀를 보여주지 않았다. 어렴풋이 그녀의 부모님과 어떤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무엇도 확실한 대답은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비참했던 휴가를 마치고 일터로 복귀한 다음날에는 몸살이 나서 일주일을 집에 누워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 5킬로 빠진 몸으로 다시 일터에 복귀한 다음에는 친구들의 술판이 이어져 나를 위로했다. 빠진 몸무게도, 봄이 지나면서 활기를 넘어선 바쁨이 찾아온 일터도, 친구들의 위로섞인 공술도, 나를 추스릴 수는 없었다. 옛 어른들의 말은 틀린게 없다고 했던가, 나를 조금씩 다잡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시간이었다. 더운 줄 모르고 멍하게 지나간 여름과, 한껏 계절을 타며 술독에 빠졌던 가을이 지나고 다시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는 계절이 찾아오는 동안 나는 조금씩 다시 혼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외톨이가 된 내 손가락은, 창밖의 거리가 맡게 한 상념의 향기에 취해 키보드 위를 하릴없이 까딱거리고 있을 뿐이다. 심지가 굳지 못한 내 눈물샘은 기어이 눈물 한방울을 떨군다. 눈물은 손가락을 타고 흘러 찌들고 늘어난 키보드 스킨위에 떨어진다. 키보드 스킨도, PC도, 이 사무실도, 모든 것이 1년 전 성탄전야와 똑같지만, 나는 외톨이가 되어 적은 양의 잔업을 앞에 두고 상념에 취해 있을 뿐이다...
30분도 걸리지 않는 양이었다. 팀장이 올해 맡긴 작업의 양은 실제로 타자를 두들겨 보니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런 걸 굳이 오늘 마치고 가라고 잔업을 지시한 팀장의 의중이 궁금해 질 정도로. 사안이 조금 급한 것이긴 했지만, 어차피 퇴근 후에 마무리 짓는 것과 출근 하자마자 처리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옛날 생각에서 깨어난 뒤였고, 거기에는 2시간이나 멍한 채 앉아있는 내가 있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수가 나오는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거울속의 쾡한 얼굴을 바라보며 내 얼굴을 짓누르는 현실을 바라본 뒤에야 제대로 키보드를 두들길 수 있었다. 문서에 오류나 틀린 곳이 없는지 다시 한번 검토해 본 뒤, 서류를 팀장의 책상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나서 사무실의 전등과 복사기를 끄고, 문단속을 하고 거리로 나섰다. 작년과 비슷한 시간에 나온 거리는 작년과 대체로 비슷한 풍경이었다. 차가운 공기, 조용히 춤추는 듯 술렁거리는 거리, 팔짱을 끼고 긴 목도리를 나눠 두른 어린 연인들... 네온사인으로 밝은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문득 앞에서 걸어오는 청년에 눈길이 머물고, 내 발걸음도 멈춘다. 무슨 인형일까, 번쩍이는 루돌프와 트리 무늬 포장지에 싸인 커다란 짐을 끌어안고 잰 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오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 포장지와, 그걸 안고 있는 모습.. 당연히 그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내 곁을 스쳐지나간다. 얼굴에는 기대감과 행복함이 뒤섞인 기쁜 표정을 떠올린 채로. 나는 그저,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청년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린다....메리...크리스마스... 행복한 성탄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