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를 두드리다, 문득 모니터 우측 아래의 시계를 보니 친절하게 퇴근시간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다. 수동적으로 일을 맡아 능동적인 척 처리하는 것에 익숙해진 몇년새에, 어느덧 능동적으로 시간을 죽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일을 열심히 하기. 일을 열심히 하면, 평가도 올라가고 분위기도 좋아지고 가끔 점심을 흐뭇하게 얻어먹을 수도 있다. 전공과 관계없는 직업을 택해, 자아실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작업으로 시간을 죽이며 한달에 한번 통장에 들어오는 급여를 체크하는게 크나큰 기쁨이 된 일상. 그 어떤 잘못된 점 없는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이다. 나는 행복하다.
-수고하셨습니다아.
형식적인 퇴근 인사를 외치고 문을 열고 사무실을 나선다. 익숙해진 정장 수트가 새삼스럽게 새롭다. 비가 온 탓인지, 황사의 냄새가 남아있지 않은 공업지구의 산뜻한 공기를 마시며 매연을 뿜으며 달려오는 버스를 반가운 눈길로 맞이한다. 지친 얼굴의 버스 기사와는 대조적으로 무미건조하게 삑삑거리는 요금 정산기와, 교통수단을 이용할 자격을 뽐내는 지갑 속의 교통카드. 빈 자리에 털푸덕 주저앉아, MP3를 재생하고 이어폰으로 잠시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허구헌날 들어서 그다지 감흥도 없는 곡들을 몇번인가 버튼을 눌러 넘기고 마음에 드는 곡이 나오면 그 곡을 듣는다. 흥얼거리며, 에어드럼을 치며, 박자를 맞추며 고개를 까딱거리노라면, 버스는 내가 내려야 할 곳에 도달한다. 내리는 문에 서서 다시 지갑을 꺼내 찍고, 내려도 좋다는 허가를 득하여 버스에서 내린다. 길어진 태양에 비낀 정류장의 목련이 새롭다. 잔인한 4월이라지만목련의 색은 아름답기만 하다. 목련 나무를 지날때, 곡이 다음 곡으로 바뀌었다. 그 노래다. 나는, 행복하다.
그 노래는 그리 마음에 드는 노래는 아니다. 좋아하는 가수도 아니고, 좋아하는 풍의 멜로디도 없고, 창법은 솔직히 짜증난다. 하지만, 1년 가까이 그 곡은 내 플레이어의 물리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 그 멋대가리 없는 가사에 잔뜩 감정이입을 해서는 혼자 기분을 열심히 가라앉힌다. 바닥이 어딘지도 모른채로. 그 아이는, 이 노래를 내게 가르쳐주고, 그리고 내게서 떠나갔다. 애써 눈물 감추며 혼자 괴로워 했으리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내 쪽이 드러내놓고 눈물 흘리며 여기저기 괴롭다고 뒹굴고 다녔기에 겸연쩍기는 하다. 내 나름대로 슬프고 애처롭지만 행복한 사랑을 했기에, 음... 나는... 행복하다.
금요일 저녁이면 늘 사는 5장의 복권. 그리고 언제나 틀리는 5장의 복권. 틀린 복권에 소중하게 연필로 동그라미를 치고, 자못 화난 듯 절반씩 3번을 찢어 휴지통에 넣는다. 한동안은 간간히 본전치기는 했었는데. 고개를 들어 주변을 문득 둘러보니, 각종 산업쓰레기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커다란 가슴을 하고 안경을 쓴 미인 누나와 뿔달린 로보트들. 그리고 재활용도 안되는 얇고 동그란 플라스틱 디스크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네모난 모니터. 흐음. 대중적이지 못하고 평범하지 않은 취미에 열을 올리고 살고 있지만, 아직은 그것들이 재밌고 좋다. 열삼히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자기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아직은 재미있는 것들이 있어서, 음. 그래, 나는 행복하다.
계절에 어울리는 노래를 연습한 것이 벌써 1년 전. 이렇게 살다보면 또 1년이 흐르겠지. 세월 속에 눈물로 씻어낸 마음이 이따금 추억으로 돌아오긴 하지만,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내 주변에 있어주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며 또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 아침에는, 또다시 일찍 일어나 넥타이를 매어야 하겠지. 갈 곳이 있고, 할 일이 있다. 그게 지금의 내 정체성이다. 이성의 색다른 체취가 그립고 마음씀이 그립고 온기가 그립지만, 언젠가 알맞은 타이밍이 주어질 때까지는 또 열심히 일상에 임해야겠지. [귀찮아]와 싸워이겨 훌륭한 사람이 되자. 큰일을 해야 위인이라면, 나는 내 일상을 위해 큰 일을 조금씩 해치워 나가리라. 뭐, 내가 만족하는 위인이고 내가 만족하는 훌륭한 사람이면 되어도 좋겠지. 다들 잘 자요. 나는 오늘도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