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아무튼 문장을 쓴다] | 2006. 6. 9. 12:33
|
"몇 시라고 했지?" “18시..면 몇 시야?” “여섯시. 그런 것도 모르냐?” “지는 언제부터 알았다구..” “남자는 군대 갔다오면 다 알어. 모르는 게 이상한거지.” “...마초..” “에에?” 버스가 몇 시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시간에 민감한 성격 탓에, 짐을 챙기는 시간에 쫓기는 그녀의 자취방에 찾아가 가방을 챙겨주고, 늦은 점심을 터미널에서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다만 터미널의 맛없는 식당에서 늦은 식사를 깨작거리고 소파만이 쓸만한 커피숍에 앉아 묘하게 끊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꺼낸 말이 반가워서 되물어 보았을 것이다. 이제 조금 뒤면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될 그녀를 앞에 두고, 나는 이상하게 틱틱거리고만 있다. 다 마셔버린 코코아잔을 괜시리 들었다가 내려놓고, 그녀 혼자 어떻게 내려서 움직일지 암담하기만 한 가방을 바라보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아마도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복잡한 심정이리라. “좀 걸을까?” “가방...” "내가 들면 되지. 이리 줘." 호기를 부렸지만 가방의 무게는 만만치 않고, 크기도 작지 않다. 혼자 사는 작은 자취방의 짐들을 최대한 택배로 보냈다고 했는데도 짐이 이렇게 많은 건 무슨 조활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가방을 들쳐메는 틈에, 그녀는 재빨리 음료의 계산을 치른다. 어차피 가는 길인데 노자에나 보탤 일이지. 가방을 메고 커피숍 밖으로 나와, 승강장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아직 30분 이상 시간이 남아있으니 조금 더 돌아다니는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멍하니 앉아서 마주봐고 있어야 괜히 기분만 가라앉을 뿐. 30분이 지나면 그녀는 버스에 올라 일단 그녀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제법 오랜 시간의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 친척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한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예정으로. 아직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나를 알려주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은데... 그런 안타까움만이 가슴속을 지나 머리 속까지 빙빙 돌고 있다. 몇 걸음 앞에 놓인 음식점 간판을 괜시리 발로 툭 건드려 보지만, 의미없는 행동은 빙빙 도는 안타까움을 세우는 의미가 되지 못한다. 나도 참 바보다. 차라리 지금 안타까운 마음을 솔직하게 내비치고 엉엉 울어버리면 차라리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지 모르는데, 그녀의 유학 이야기가 나온 후로 언제부턴지 모르게 솔직하게 마음을 말하지 못한다. 괜히 말을 툭툭 내뱉고, 쓸데없는 곳에서 정곡을 찌르고. 그녀도 역시 그렇게 나를 대하고 그러는 가운데 아픈 마음에 자잘한 상처들이 더해져 왔을 뿐. 그 마음은 자존심일까, 덜 자란 어리광일까. 어느 쪽이건.. 나도 그녀도 바보다. 솔직하지 못한, 뻔한 거짓을 반복하는 두 바보. 터미널 외곽을 한바퀴 돌자, 다시 승강장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나온다. 지금 당장 한마디라도 더 기분 좋은 말을 해주면, 들으면 좋을 것을...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발은 터벅터벅 승강장을 향하고, 출구 쪽의 문 위에 걸린 시계는 버스가 승강장에 곧 도착할 것을 알린다. 그 버스는 이제 그녀를 데리러 와서, 그 뒤엔 내가 알 수 없을 내일로 그녀를 실어갈 것이다. 지금 나는, 솔직히 말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는 그녀에게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바보같은 생각인 줄은 알지만... 버스야, 안 오면 안 될까? 난 그녀를 너무너무 사랑한단 말야... “저기..” “앙?” “한 바퀴 더 돌거야? 이제 슬슬 타야 해..” “어? 응... 응.” 기회는 지금 뿐이다. 무의식 중에 터미널을 한바퀴 더 돌려는 발걸음을 불러세운 그녀와 함께 승강장으로 향하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그녀에게 무언가 한마디를 제대로 건넬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고 있어도 말은 나가지 않는다. 어떤 진지한 말을 조금 꺼내려고 하면 그 순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그러기는 싫은 자존심 한조각 때문에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고 조용히 승강장으로 향한다. 승강장에는 그리 길지 않은 줄이 서 있어서 줄 뒤에 가서 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가 들어온다. 어디선가 푹 쉬고 온 듯한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승강장에 들어와서는 정확한 위치에 버스가 선다. 버스의 문이 열리고, 버스기사가 내려와 짐 칸을 열어주고, 푸근한 인상의 검표원이 문 옆에 다가와 사람들의 표를 검사하기 시작한다. 나는 혼자서 짐칸으로 다가가,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짐칸에 넣는다. 그녀는 과연 이걸 어떻게 내려서 가지고 갈까? 가방을 넣고 뒤돌아보니, 그녀의 바로 앞에 서있던 사람과 검표원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 가까이 가니 표가 잘못된 듯, 결국 앞 사람이 표를 착각하여 이쪽으로 온 것 같다. 앞사람은 멋쩍게 표를 들고 다른 승강장으로 걸어가고, 앞사람 탓인지 검표원은 그녀의 표를 유심히 들여다 본다. 나는 왠지 그녀 곁에 바짝 붙어서지 못하고, 두어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검표원이 표를 들여다보고, 표를 반으로 찢어 반쪽을 그녀에게 돌려주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비디오처럼 느리게만 느껴진다. 표를 받고 버스에 올라타다가 문득 그녀는 내쪽을 돌아보며 생긋 웃는다. 아니, 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 나는 지금 변변한 작별인사라도 건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어느새 늘어선 줄 탓에 그녀는 다시 내려오지도 못하고 창가의 자리를 찾아가 앉는다. 그리고 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나를 바라본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며 닿지 않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을 웃는 얼굴로 보여주고 싶어 그녀와 지냈던 즐거웠던 추억들을 열심히 떠올려 보지만, 그럴 수록 내 얼굴은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울상이 되어간다. 손목이 피곤할 만치 손을 흔들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검표원이 나를 부른다. 차가 출발하면 위험하니까 승강장으로 올라오란다. 싫은 걸음으로 승강장으로 올라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는 문을 닫고,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조금 멀어진 그녀가 조금전의 나처럼 손을 열심히 흔들어 준다. 나도 그런 그녀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지만, 버스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조금씩 멀어져간다. 능숙한 후진으로 버스가 방향을 잡자, 이윽고 버스는 앞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마치 버스가 아닌 배 같은 느낌으로. 손을 흔드는 그녀가 비치는 창문이 급격히 작아져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왠지 맥이 풀려 승강장의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한숨을 쉬고 있자니 점점 기운이 빠진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다른 곳에 가는 버스가 같은 승강장에 들어오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터미널을 빠져나간다. 왠지 연결되어 있는 지하철을 타기가 싫어, 거리를 조금 걷고 싶은 기분이 된다. 터미널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왔다. 빠르게 달려나가는 자동차들과 다른 걸음으로 걷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길 양편으로 늘어선 커다란 건물들 속에서 나는 새삼 이제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원래부터 외톨이였는데, 그런건 당연했고 또 익숙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건, 왜 눈물이 멈추지를 않느냐는 사실이다. 길거리에서 창피하게. 무성의한 움직임으로 눈물을 훔치고, 문득 거리를 보자 조금 뿌연 시야에 행선지는 다르지만 그녀가 타고간 버스와 같은 회사의 버스가 지나간다. 괜시리 그 버스의 꼬리에 아까 그녀에게 하지 못한 인사가 하고 싶다는 청승맞은 생각이 들었을 때, 주머니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문자메세지다. 폴더를 열고 비밀번호를 누르자 그녀가 보낸 작별인사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뿌옇게 된 시야를 애써 훔치고, 그녀에게 답문을 보낸다. [잘가,다시만나고다시너를웃으며보낼때까지나여기그대로있을께.잘가.] --------------------------------------------------------------------------------------------------- 포크같은 느낌의 곡을 부르는 남성2인조 유즈의 좀 오래된 곡으로, 흥겨운 리듬과는 달리 조금 어린 느낌의 이별을 담고 있는 노래다. 가사가 워낙 직설적이라 이야기를 만들기 쉬워서 끄적거려 보았다. 한때 이 노래를 참 좋아했었는데, 유즈의 목소리가 조금 높은 편인데다 원래 듀엣곡이라 노래방에서 만족스럽게 불러본 적이 없다. 그러고보니 노래방 가고 싶은데...
|
|
|
|
|
|
|
|
|
+ [아무튼 문장을 쓴다] | 2006. 4. 23. 22:48
|
키보드를 두드리다, 문득 모니터 우측 아래의 시계를 보니 친절하게 퇴근시간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다. 수동적으로 일을 맡아 능동적인 척 처리하는 것에 익숙해진 몇년새에, 어느덧 능동적으로 시간을 죽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일을 열심히 하기. 일을 열심히 하면, 평가도 올라가고 분위기도 좋아지고 가끔 점심을 흐뭇하게 얻어먹을 수도 있다. 전공과 관계없는 직업을 택해, 자아실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작업으로 시간을 죽이며 한달에 한번 통장에 들어오는 급여를 체크하는게 크나큰 기쁨이 된 일상. 그 어떤 잘못된 점 없는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이다. 나는 행복하다.
-수고하셨습니다아.
형식적인 퇴근 인사를 외치고 문을 열고 사무실을 나선다. 익숙해진 정장 수트가 새삼스럽게 새롭다. 비가 온 탓인지, 황사의 냄새가 남아있지 않은 공업지구의 산뜻한 공기를 마시며 매연을 뿜으며 달려오는 버스를 반가운 눈길로 맞이한다. 지친 얼굴의 버스 기사와는 대조적으로 무미건조하게 삑삑거리는 요금 정산기와, 교통수단을 이용할 자격을 뽐내는 지갑 속의 교통카드. 빈 자리에 털푸덕 주저앉아, MP3를 재생하고 이어폰으로 잠시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허구헌날 들어서 그다지 감흥도 없는 곡들을 몇번인가 버튼을 눌러 넘기고 마음에 드는 곡이 나오면 그 곡을 듣는다. 흥얼거리며, 에어드럼을 치며, 박자를 맞추며 고개를 까딱거리노라면, 버스는 내가 내려야 할 곳에 도달한다. 내리는 문에 서서 다시 지갑을 꺼내 찍고, 내려도 좋다는 허가를 득하여 버스에서 내린다. 길어진 태양에 비낀 정류장의 목련이 새롭다. 잔인한 4월이라지만목련의 색은 아름답기만 하다. 목련 나무를 지날때, 곡이 다음 곡으로 바뀌었다. 그 노래다. 나는, 행복하다.
그 노래는 그리 마음에 드는 노래는 아니다. 좋아하는 가수도 아니고, 좋아하는 풍의 멜로디도 없고, 창법은 솔직히 짜증난다. 하지만, 1년 가까이 그 곡은 내 플레이어의 물리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 그 멋대가리 없는 가사에 잔뜩 감정이입을 해서는 혼자 기분을 열심히 가라앉힌다. 바닥이 어딘지도 모른채로. 그 아이는, 이 노래를 내게 가르쳐주고, 그리고 내게서 떠나갔다. 애써 눈물 감추며 혼자 괴로워 했으리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내 쪽이 드러내놓고 눈물 흘리며 여기저기 괴롭다고 뒹굴고 다녔기에 겸연쩍기는 하다. 내 나름대로 슬프고 애처롭지만 행복한 사랑을 했기에, 음... 나는... 행복하다.
금요일 저녁이면 늘 사는 5장의 복권. 그리고 언제나 틀리는 5장의 복권. 틀린 복권에 소중하게 연필로 동그라미를 치고, 자못 화난 듯 절반씩 3번을 찢어 휴지통에 넣는다. 한동안은 간간히 본전치기는 했었는데. 고개를 들어 주변을 문득 둘러보니, 각종 산업쓰레기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커다란 가슴을 하고 안경을 쓴 미인 누나와 뿔달린 로보트들. 그리고 재활용도 안되는 얇고 동그란 플라스틱 디스크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네모난 모니터. 흐음. 대중적이지 못하고 평범하지 않은 취미에 열을 올리고 살고 있지만, 아직은 그것들이 재밌고 좋다. 열삼히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자기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아직은 재미있는 것들이 있어서, 음. 그래, 나는 행복하다.
계절에 어울리는 노래를 연습한 것이 벌써 1년 전. 이렇게 살다보면 또 1년이 흐르겠지. 세월 속에 눈물로 씻어낸 마음이 이따금 추억으로 돌아오긴 하지만,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내 주변에 있어주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며 또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 아침에는, 또다시 일찍 일어나 넥타이를 매어야 하겠지. 갈 곳이 있고, 할 일이 있다. 그게 지금의 내 정체성이다. 이성의 색다른 체취가 그립고 마음씀이 그립고 온기가 그립지만, 언젠가 알맞은 타이밍이 주어질 때까지는 또 열심히 일상에 임해야겠지. [귀찮아]와 싸워이겨 훌륭한 사람이 되자. 큰일을 해야 위인이라면, 나는 내 일상을 위해 큰 일을 조금씩 해치워 나가리라. 뭐, 내가 만족하는 위인이고 내가 만족하는 훌륭한 사람이면 되어도 좋겠지. 다들 잘 자요. 나는 오늘도 행복했습니다.
|
|
|
|
|
|
|
|
|
+ [아무튼 문장을 쓴다] | 2006. 3. 27. 10:35
|
다음 B'z 카페 라야의 운영진 존(koshi)의 블로그에서 트랙백. 아침에 별 생각없이 들렀다가, 왠지 분위기 타서 끄적여 본다. 아울러 이 카테고리의 이름도 변경. 가끔쓰는 노래 가사로 만든 글들을 적으려 한다. ---------------------------------------------------------------------------------------------------- 까다로울 것 같았던 협상을 의외로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가벼운 마음으로 악수를 나눈 후 거래처 사무실을 나오자, 따사로운 맑은 날 오후의 하늘이 나를 맞아주었다. 봄이 무르익어가는 것을 증명하듯 먼지 섞인 바람이 부는 거리를 지나쳐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휴대전화로 사무실에 조금 전의 결과를 알리고, 조금은 잰 걸음으로 주차장을 향했다. 평소 이곳에 올 때는 작은 사무실이라 사옥에 주차장이 없어, 길 건너편의 유료 주차장을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조금 불편했지만, 결과가 좋았던 탓인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고 건너편에 무심히 눈길을 던졌을 때, 건너편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그녀가 눈에 띄었다. 그녀 주위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녀만이 크게 부각되어 보이는 착각이 들만큼. 이렇게 그녀가 눈에 크게 보이는 것은 새삼스럽게 아름다워진 그녀보다도 그녀 옆에서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다정스레 이야기하고 있는 핸섬한 남자 때문일 것이다. 지나간 시간 언젠가 그 자리에 서있던 것이 나였기에 내 눈은 그 광경을 이렇게 크게 잡고 있는 것이리라. 내 눈길은 길 건너편에서 이렇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다. 이미 과거의 존재가 되어버린 나를. 그리고 스쳐 지나가 버린 일들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서로 사랑하며 보냈던 그녀와 나지만, 이미 시간들을 기억 속에 접어두기로 한 것이 벌써 1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꽃 한 다발과 작은 선물과 촛불만으로 행복했던 언젠가의 뜨거웠던 추억들을 기억 속에 접어 넣어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식혀 가는 일을 쉽게 익숙해질 거라 생각했었다. 그녀를 놓아줘야만 했던 슬픔에 흘린 눈물만큼, 눈물 흘린 시간만큼, 그 슬픔의 크기만큼 곧 잊어버릴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익숙해 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짧은 상념과 복잡한 추억에 젖어 있는 동안 어느새 신호등은 바뀌고, 슬슬 혼잡함이 시작된 오후 시간을 알리듯 건너편에서도 이쪽에서도 인파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상념은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다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여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처음에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던 그녀와 내 발소리는 이내 주변 사람들의 발소리에 감싸이듯 섞여 곧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그녀는 내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채 내 곁을 스쳐지나간다. 그녀를 놓아버렸던 순간을 후회하고 싶어질 만큼 아름다워진 그녀의 목소리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모습과 달리 내 귓전에 남아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지금보다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한없이 내 마음에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모습을 되돌려 주며 머릿속의 상념을 가슴속의 아련함으로 바꾸어 버린다. 지금은 이미 다 식어버려 그녀 없는 일상에 익숙해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나는 순간적으로 뒤돌아서서 그녀를 다시 한 번 불러 세워 시시한 일상이라도 떠들어 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그저 마음만이 초조하리만치 안타까워지고, 벌써 1년이 가까워 오는 과거 속의 이별이 아련해진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 속에서 고이고이 잠들어 가는 기억의 가운데, 그녀를 잃고 외톨이가 되어서도 이렇게 누군가를 격렬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술기운을 빌어 소리 지르고 눈물 흘리며 원망했던 언젠가의 밤조차 이상하게도 아련한 추억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기분이 행동으로 바뀌는 일도 없이 그저 가슴의 떨림으로만 남아, 지금 이 순간을 다시 상기하게 되어 버린다. 지금은 이제 각각의 인생을 걷고 있다. 불러 세울 수 없는 그녀와 뒤돌아 보지 못하는 나의, 두 가지의 발소리가 길모퉁이에 사라져 간다. 나는 애써 고개를 흔든다. 내가 지금 해야할 일은,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어 사무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의 오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
|
|
|
|
|
|
|
|
|
+ [아무튼 문장을 쓴다] | 2005. 12. 6. 21:59
|
1편에 이어서. 조금 긴데, 이럴때 히흘후처럼 줄일 수 잇는 기능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시큰해지려는 콧날에 상념에서 깨어난다. 팔짱을 낀 채로 내려다 보던 거리는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거리에춤추는 불빛들이 너무나 환해서 축복받은 밤의 기운이 유리창 너머 혼자인 나를 비추어 주고 있다. 팔짱을 풀고, 양 손바닥을 마주대고 가볍게 비벼본다. 손을 비비는 소리와 그 따스한 마찰은 아무런 의미없는 행동이지만, 이제 많지 않은 잔업에 다가가야 한다는 마음의 준비는 된다.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로 돌아가 키보드에 손을 얹지만, 상념은 완전히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키보드 위를 까딱거리는 두 손은 메모지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제는 잡을 수 없는 그녀의 손을 떠올린다. 언제까지나 잡고서 걸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 작고 차가왔던 손을. 늘 손이 차가와서 내가 손으로 잡고 가끔은 내 옷 속에 넣어서 따스하게 해주었던 그 손... 그 손을 잡고 있을 때에는 언제나 세상 모든 것들이 반짝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그 손을 잡고, 서로의 슬픔도 기쁨도 모두 이해하며 함께 꿈을 따라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외톨이가 되어 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빛바랜 오늘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그날의 상념은, 나를 쉽사리 일로 돌려보내주지 않는다. 나는 그저 누르지 못하는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만을 까딱거리고 있다. ---------------------------------------------------------------------------------------------------------------------
한적한 동네의 썰렁한 역까지도 성탄전야의 분위기에 들썩이고 있고, 나는 거리에 흘러나오는 젊은 가수의 캐롤송을 따라 부르며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녀의 오빠와 자취를 하고 있지만, 오늘 그녀의 오빠는 연인과 성탄전야를 성스럽게 보내기 위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은 단둘이서 우리 나름대로 성스러운 밤을 보낼 계획을 세웠고, 예정보다 늦어져 미안하긴 했지만 그녀의 집에 가까워지는 길가에서 흘러나오는 내 콧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선물을 끌어안고 잰 걸음으로 그녀의 집에 도착해, 조용히 키패드를 눌러 그녀의 집 문을 열었다. 빼꼼 들여다 본 집 안에서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팬케이크와 스파게티 정도의 가벼운 메뉴였지만 그것은 그녀 나름대로 특기인 요리들이었고 또 나는 그녀의 팬케이크를 좋아했다. 조용히 들어가 선물을 문간에 살그머니 내려놓고,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식탁에 올려놓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고생했다.. 추웠지? 오빠네 팀장 진짜 성격 특이하다. 오늘 같은 날.][괜찮아. 그래도 빨리 끝냈지 뭐. 그보다 이거.] 가방을 내려놓고, 옆에 내려놓았던 의자를 자랑스럽게 들어올렸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선물에 조금 놀라고, 포장을 뜯고는 내용물에 더 놀란다. 그 놀라는 얼굴 표정 속에서 정말로 기뻐하는 눈매와 입술을 보았고 나도 모르게 나는 그녀을 끌어 안았다. 그녀는 손에 포장을 막 뜯은 의자를 들고 나에게 안겼고, 나는 의자와 그녀를 함께 안고서 잠시 그대로 있다가 곧 함께 저녁상을 마저 차렸다. 웃으며 그 겨울 가장 맛있었던 저녁을 먹고, 캐롤을 들으며 함께 설거지를 하고, 문을 꼭 잠그고, 촛불을 켜고, 함께 샤워를 했다... 살갗이 드러난 그녀의 등에 한 손을 두르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침대에 누워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 등뒤에서 빛나고 있는 촛불은 어두운 방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고, 그 불빛에 물든 그녀의 얼굴은 조금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결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 생김이지만, 나는 그녀의 웃는 얼굴과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표정이 좋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얼굴은 세상에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고, 그 표정은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었다. [너희 오빠한테 감사해야겠다. 오늘 외박해줘서 고맙다고..][지금쯤 우리는 상대도 안되게 야하게 하고 있을걸 뭐.] 그녀의 오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와 그녀의 집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그녀의 부모님은 나를 우울하게 한다. 문득, 지금 이 순간의 커다란 행복과는 다른 어떤 두려움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 언젠가는 이 사람이 내게서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만약 지금 그녀가 내게서 사라진다면... 그런 무서운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상상도 되지 않았고, 지금 내 품에 안겨있는 그녀를 놓쳐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생각 때문이었는지 그녀의 등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조금 표정을 찡그렸지만 그 표정까지도 너무나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자, 내 못난 얼굴 뒤로 방을 물들이고 있는 촛불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촛불의 안쪽에 숨어있을 그녀의 진심에 닿기를 바라며 나지막히 말했다. [우린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거야. 절대로. 우린 지금처럼 쭉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응.. 꼭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이며 대꾸해 주었다. 그 작은 목소리를 듣자,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가슴 한쪽이 따뜻해져 오면서도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떠올라,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작은 흐느낌이 되었고, 그녀는 내 알 수 없는 마음을 다독거려 주려는 듯 작은 손으로 나를 끌어 안아주었다..... ---------------------------------------------------------------------------------------------------------------------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정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던 그녀는 아무런 이유도 핑계도 대지 않고 메일로 이별을 통보해 왔다. 전화를 해 보았지만 받지 않았고, 문자 메세지도, 연차를 내고 찾아간 그녀의 짚 앞도 내게 그녀를 보여주지 않았다. 어렴풋이 그녀의 부모님과 어떤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무엇도 확실한 대답은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비참했던 휴가를 마치고 일터로 복귀한 다음날에는 몸살이 나서 일주일을 집에 누워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 5킬로 빠진 몸으로 다시 일터에 복귀한 다음에는 친구들의 술판이 이어져 나를 위로했다. 빠진 몸무게도, 봄이 지나면서 활기를 넘어선 바쁨이 찾아온 일터도, 친구들의 위로섞인 공술도, 나를 추스릴 수는 없었다. 옛 어른들의 말은 틀린게 없다고 했던가, 나를 조금씩 다잡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시간이었다. 더운 줄 모르고 멍하게 지나간 여름과, 한껏 계절을 타며 술독에 빠졌던 가을이 지나고 다시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는 계절이 찾아오는 동안 나는 조금씩 다시 혼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외톨이가 된 내 손가락은, 창밖의 거리가 맡게 한 상념의 향기에 취해 키보드 위를 하릴없이 까딱거리고 있을 뿐이다. 심지가 굳지 못한 내 눈물샘은 기어이 눈물 한방울을 떨군다. 눈물은 손가락을 타고 흘러 찌들고 늘어난 키보드 스킨위에 떨어진다. 키보드 스킨도, PC도, 이 사무실도, 모든 것이 1년 전 성탄전야와 똑같지만, 나는 외톨이가 되어 적은 양의 잔업을 앞에 두고 상념에 취해 있을 뿐이다...
30분도 걸리지 않는 양이었다. 팀장이 올해 맡긴 작업의 양은 실제로 타자를 두들겨 보니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런 걸 굳이 오늘 마치고 가라고 잔업을 지시한 팀장의 의중이 궁금해 질 정도로. 사안이 조금 급한 것이긴 했지만, 어차피 퇴근 후에 마무리 짓는 것과 출근 하자마자 처리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옛날 생각에서 깨어난 뒤였고, 거기에는 2시간이나 멍한 채 앉아있는 내가 있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수가 나오는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거울속의 쾡한 얼굴을 바라보며 내 얼굴을 짓누르는 현실을 바라본 뒤에야 제대로 키보드를 두들길 수 있었다. 문서에 오류나 틀린 곳이 없는지 다시 한번 검토해 본 뒤, 서류를 팀장의 책상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나서 사무실의 전등과 복사기를 끄고, 문단속을 하고 거리로 나섰다. 작년과 비슷한 시간에 나온 거리는 작년과 대체로 비슷한 풍경이었다. 차가운 공기, 조용히 춤추는 듯 술렁거리는 거리, 팔짱을 끼고 긴 목도리를 나눠 두른 어린 연인들... 네온사인으로 밝은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문득 앞에서 걸어오는 청년에 눈길이 머물고, 내 발걸음도 멈춘다. 무슨 인형일까, 번쩍이는 루돌프와 트리 무늬 포장지에 싸인 커다란 짐을 끌어안고 잰 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오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 포장지와, 그걸 안고 있는 모습.. 당연히 그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내 곁을 스쳐지나간다. 얼굴에는 기대감과 행복함이 뒤섞인 기쁜 표정을 떠올린 채로. 나는 그저,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청년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린다....메리...크리스마스... 행복한 성탄이 되길...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