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2005)
점심을 먹으러 나가려다, 문득 생각이 나서 통장을 챙겼다. 오랫동안 하지 않은 통장정리라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1년이 조금 지나서, 그 절반 정도의 기간 동안 정리하지 않은 통장 두 개를 챙겨들고 사옥 밖으로 나섰다. 목도리와 패딩 점퍼로 무장하고 출퇴근길에 떨던게 불과 3~4일 전인데, 공기는 놀라우리만치 부드러워져 있었고 바람도 따스함을 머금은 차가움으로 뺨에 와닿는다 .매서운따가움으로 따귀를 때리던 며칠 전의 바람과 비교하니, 참으로 대단한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맑지 않은 하늘 아래, 동절기용 사원 점퍼를 입고, 통장 두 개를 소중히 품고 은행을 향하는 늦은 점심시간이 조금 이른 봄기운을 탐색하는 채집꾼이 된 것 같아 괜시리 기분이 좋았다.
어딘가의 가게에서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의 멘트가 들렸다. 점심시간에 방송되는 가요 리퀘스트 프로그램-애청자들이 보낸 엽서와 인터넷 투고를 통해 신청곡을 가려, 그것을 방송하며 몇 가지 코너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들려왔다. 문득, 4년 전에 군생활하던 시절의 점심시간의 여유와 닮았다는 생각이 머리 한 쪽을 스치는 것과, 그 시절의 정취를 실은 바람이 코끝에 잠시 걸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후방의 모사단에서 의무병 생활을 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는 군대에서 어지간하면 점심시간의 여유는 보장되어 있었다. 여유가 있다고는 해도, 딱히 할 만한 일이 없는 곳이 또 군대인지라 나는 자연스럽게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는 노래들과 신청곡들을 방송해 주는 프로그램을 점심시간에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점심을 먹고 와서 유쾌한 목소리의 DJ가 진행하는 그 프로그램을 듣는 것의 거의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세척한 뒤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손을 전투복에 대강 문질러 닦고 라디오의 스위치를 켜는 그 순간은 잠시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대중가요를 그리 많이 듣지 않는다. 주변 사람이 정말 좋은 노래라며 아주 추천해 주지 않는 다음에는 스스로 찾아서 듣는 경우가 거의 없고, 라디오보다는 몇 백 번은 들은 익숙한, 그러면서 흘러간 노래를 담은 CD를 듣는 일이 많다보니 신곡에는 어두운 편이지만 군생활을 하던 그 당시에는 조금 달랐다. 그런 점은 모든 군인들의 공통적인 모습이겠지만. 그 때 듣던 노래들은 요즘도 가끔 생각이 난다. 추억이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포장해 준다고 했던가, 길고 지루했던 군생활속에서 찾던 여유 속에 있던 - 지금은 이름을 잊은 여자DJ의 유쾌했던 진행과 목소리와 노래들은 그것이 언제였건간에 따사로운 여름의 햇살을 맞으며 물기 묻은 손을 털며 의무반으로 달려오던 군복입은 나를 떠오르게 한다. 군인인 나를 스쳐 지나가던 그 곳의 따스한 바람...
그 바람이, 금방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저 느껴질 뿐인 바람은 희미한 미소를 내 머릿속에 떠올리며 온화한 햇살이 굽어보는 도시를 거닐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멀리서 그랬던 것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가며 빙그레 웃는다. 나도,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