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다. (2004)
안타깝다. 글씨로 써보면 역시 느낌은 와 닿지 않는다.
안타깝다... 입으로 발음해 보면, 이제 느낌이 난다.
안타깝다. 그렇다. 지금 내 마음은 안타까움이라는 말에 잘 어울리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맑은 듯 했던 날씨가 갑자기 구름으로 가려져, 오늘은 이만큼의 햇빛을 받겠다고 다짐한 양을 채우지 못해서인지 안타까움은 더해간다.
나는 평범한 남자다. 그리고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어떤 면에서는 평범치 못하다. 보편타당함에 완전히 젖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면이 있고, 전혀 보편타당하지 않게 세상을 바라보다가 뒤통수를 맞는 일면도 있다. 나는 지금 지극히 보편타당한 일상을 보내고 있고, 그 안에서 그다지 일탈을 꿈꾸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눈앞에 서 있는 유리창 너머의 풍경은, 지금 나에게 안타까움을 수북이 안겨주고 있다.
나에겐 그녀가 있다. 때론 상처주고 때론 달아오르는 흔한 연애를 하고 있는 그녀가 있다. 나는 그녀를 많이 좋아하고, 그녀도 나를 많이 좋아한다. 아름다운 현실이 있고, 처참한 픽션이 있다. 나는, 처참한 현실과 아름다운 픽션의 중간에 있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평범하게 세상을 살아가려고 결심하고 있는 내가 있고, 뒤통수를 때리던 맞던 뒤통수와 관련된 특이한 삶을 살고 싶어서 투정 부리는 내가 있다. 그리고 이래도 저래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막나가는 내가 있다. 이 모든 '내'가, 진짜 나와는 또 다르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나도 있다. 문제는.. 이 모든 '내'가 지금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고, 눈물을 흘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누구에게나 악담을 퍼붓고 빙긋 웃고 넘기려는 나도, 건실한 척 성실한 척 묵묵히 살아가는 척 하는 나도, 게으름뱅이인 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이 안타까움은, 두려움에서 출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문장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마음은 조금 개운해 진다. 그렇지만 이 문장은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하얀 바탕 위의 흰 글씨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은 서글픈, 눈물이 되지 못한 자위행위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문장은 서글프다. 그렇지만 그 서글픈 문장은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서 있다는 것만큼은 증명해 주고 있기에, 고맙기 그지없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고마움과 서글픔은, 흘리지 못하는, 흘릴 수 없는 눈물이 되어 내 머리 속에 흐른다.
세상에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 사람은 살고, 시간이 흐르는 만큼 사람도 흐른다.어딘가에 있을 영원을 찾아 사람은 헤메이고, 헤메이는 사람의 등 뒤엔 늘 영원이 서 있다. 사람은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전향적으로 고정되어 버린 목 근육과 안구 덕분에 영원을 찾고 싶다는 목적을 위해 일생을 살아간다.
어쨌든 상관없다. 중요한건.. 언젠가 내가 나 스스로의 위치로부터 한 발짝 떼어 놓기 위해 쏟아놓고 있던 문장이 다시금 내 머릿속에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걸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고 펜을 달리고 싶은 욕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 문장을 읽을 사람들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또 어디에도 갈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 문장들을 쓰고 있는 이유는 확실하다. 난 다시 또 한 발짝 떼어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문장을 달린다. 그리고, 이 안타까움을 소중히 안고 조금 덜 안타까워지기 위해.
문득 눈을 들자, 저 멀리 건물 옥상 물탱크 위에 푸른 하늘의 파편이 걸려있다. 회색 구름들 사이로.
후후. 무거운 발을, 또 한걸음 옮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