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 덕분에 잠에서 깨었다. 이른 아침의 맑은 햇빛이 비쳐 들어와 방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 뒤척이다, 일어나 앉아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가운을 걸치고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식당에 가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내려와 있어, 식당은 꽤나 복작거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제공되는 아침식사는 간소한 메뉴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는 부페식이었는데, 일본식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싱거운 맛이었다. 낫토를 비롯해서 이것저것 퍼다 먹어 보았지만, 결국은 밥과 국, 간단한 고기요리들로 요기를 하였다. 개인마다 조금 느낌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아침식사였지만, 기본으로 그저 제공되는 식사치고는 충분히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식사를 마치고 일단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가, 아침 목욕을 즐기기 위해 다시 탕으로 향했다. 날이 바뀌어, 남탕은 본격적으로 푸른 하늘을 보며 즐길 수 있는 노천탕으로 바뀌어 있었고,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노천탕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여러 종류의 탕을 돌며 얼마나 즐겼을까, 기념품을 사기 위한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남겨놓고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탕에서 나왔다.
방에 들러 유가타와 가운을 벗고, 어제 입고 왔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은 뒤 언제 다시올 수 있을지 모르는 호텔방을 휘 둘러본 후 기념품 점으로 향했다. 전날 징기스칸을 먹었던 가게와 인접한 기념품 가게에 들러 부모님을 위한 기념품을 몇가지 사면서, 욘사마의 나라에서 왔냐고 반가워하는 아주머니와 짤막한 대화를 나누다 시간에 쫓겨 마호로바 앞으로 돌아왔다. 올 때 탔던 버스가 마호로바 앞에 대기하고 있었고,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는 언젠가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을 담아 차창 밖에 보이는 노보리베츠의 산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윽고 버스 출발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왔던 길을 되짚어, 버스는 다시 삿포로 시내로 향했다. 올때와는 달리 맑은 날씨가 기분 좋았지만 아쉬움이 남는 온천 호텔을 떠나는 것은 그렇게 상쾌한 기분만은 아니었다. 버스는 태평양이 보이는 해변 도로를 달려, 나와 동생을 삿포로 시내에 내려주었다.
12. 삿포로에서 마지막 쇼핑, 마지막 밤.
버스가 내려준 곳은 오오도리 공원. 이틀 전 구경을 나왔던 거리였다. 이틀만에 보는 테레비토오를 보며 아는 광경이 나왔다고 혼자 즐거워하다가, 일단 요기를 하기로 하고는 북오프 맞은편에 있는 모스버거에 들어갔다. 이틀전에 들렀을 때는 파티용 치킨만 사가지고 갔었지만, 한국에 없는 체인점의 유명한 버거가 먹어보고 싶어 하바네로 칠리 어쩌구 하는 햄버거를 시켜 보았는데 이름에 비해 그다지 매운 맛이 강하지는 않았다.
햄버거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타누키코오지와 요도바시 카메라를 지나며 계획했던 것들의 쇼핑을 끝냈다. 시기가 나빠 미처 구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동생의 안내로 충분히 재미있게 구경하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라오케에 들러 한국에 없는 JPOP들을 불러 보았는데 묘하게 음정이 다른 느낌이었다. 대략 더 힘들다고 해야하나...
가라오케를 나와 저녁에 쓸 냉동 징기스칸과 주전부리를 사서 눈길을 걸어 동생의 아파트에 돌아갔다. 동생이 솜씨를 발휘한 야키소바와 징기스칸에 맥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제법 바쁜 일정탓이었을까, 많은 곳을 돌아보고 나름대로 열심히 돌아다녔다는 만족감과 가보지 못한 곳들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꿈에 나온 듯한, 그런 밤이었다.
13. 집으로.
조금 여유있게 일어나, 동생이 마지막으로 차려주는 아침을 먹었다. 뭔가 잊어버린 것이 없는지 짐을 체크하고, 동생의 여름 옷가지들을 챙겨 두배가 된 여행가방을 끌고 아파트를 나섰다.
전날 맑았던 하늘과는 대조적으로, 아침부터 흩날리는 굵은 눈발이 조금 불
안했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길이라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길을 나섰다. 일단 신삿포로에서 JR을 타야 했기 때문에 처음 올 때와 같은 길을 걸어나갔다. 나가는 길에, 처음 왔을 때 점찍어 뒀던 눈사람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정말이지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준수한 눈사람이었는데, 멋대로 유키타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는 혼자 괜히 좋아했더랬다.
유키타로와 사진을 찍고 주변을 다시한번 둘러본 뒤, 여행가방을 짊어지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침시간의 한가한 버스를 타고 신삿포로 역에 도착해서 왔을 때와 반대의 방향을 더듬어 JR에 올랐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오랫만에 만난 동생과의 해후에 기뻐하고 한국과는 다른 밤시간의 홋카이도에 당황하고 했었는데, 그래도 한두번 다녀본 길이라고 묘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JR은 이윽고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했고, 곧바로 ANA 창구로 가서 수속을 밟았다.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동생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뭔가 그럴 듯한 것이 먹고 싶어 식당가를 돌아봤지만,
결국 라멘을 먹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아사하카와 쇼유라멘이라는 것을 먹었다. 곧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먹었더니 무슨 맛인지 기억에 남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못 먹을 맛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라멘을 먹고 게이트로 가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동생에게 작별을 고하고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런데 예상밖의 트러블이 생겨버렸다. 밖에 눈은 그쳐있었지만 기상 상태를 점검하느라 약 1시간 동안 딜레이되었기 때문에 결국 지나치게 일찍 들어간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간사이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갈아타는데 드는 여유시간이 1시간 남짓이었기 때문에, ANA의 직원들이 다가와 간사이에서 내리면 조낸 뛰라는 친절한 경고도 해 주었다. 여유롭게 잘 놀고 막판에 이게 무슨 꼴인지...
결국 파란 하늘을 날아 간사이에 도착한 후, 말 그대로 조낸 뛰어 한국행 비행기가 기다리는 게이트에 도착해보니, 이쪽도 조금 딜레이가 되어 결국 간사이에서도 30분 가량 늦게 비행기가 이륙하게 되어버렸다. 좀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 큰 탈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탈 수가 있었고 예정했던 것보다 조금 늦게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공항에서 공항리무진버스를 타고 구파발에 와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갈 수록 뭔가 남는 것 없이 많이 뛰어다닌 것 같은 여행길이었지만, 동생의 도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루해한다는 홋카이도 여행을 즐겁게 다녀올 수 있었고, 전의 간사이행과는 달리 비교적 풍요로운 여행길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념품을 돌릴 정도로 호기로운 여행길은 또 아니었지만서도..
아무튼, 돌아온지 거의 100일만에 여행의 기록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인간이 게으른 탓이라는 자조섞인 반성을 해 본다. 올해도 일본이든 어디든 여행을 떠나보고는 싶지만, 없는 살림에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다. 다음번에 멀리 나들이 가게 되는 곳은... 어딜까?
호텔방에 준비되어 있던 유가타와 가운을 입고, 어슬렁어슬렁 탕으로 향했다. 호텔 마호로보의 탕은 아쉽게도 남녀 혼탕이 아니었고 윗층과 아랫층을 하루에 2번 교대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어느 층이건 노천탕과 실내탕(이랄까..)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윗층은 하늘이 보이고 정말 노천탕이라는 느낌이 나는 반면 아랫층의 노천탕은 야외라는 느낌은 나지만 지붕으로 가려져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차이점을 가진 두 층을, 낮에는 윗층이 남탕, 아랫층이 여탕, 밤에는 또 반대로 바뀌어 사용하게 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뭐.. 대강 그 의도는 짐작이 갔지만, 아무튼 재미있는 방식이었다. 나와 동생이 탕에 들어갔던 시간은 밤이었으므로 아랫층이 남탕인 시간이었다. 일본식으로 되어 있는 장막을 헤치고 들어가면 마음에 드는 자리에 가서 바구니 안에 벗은 옷을 넣어놓고 가는 식이었다.
나는 당연히(랄까..) 178번 바구니의 자리에 가서 유가타를 벗고, 탕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실내탕을 접하게 되는데, 실내탕은 유황냄새가 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대중탕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한국식
때밀기 코너도 준비되어 있었고, 약간 종류가 많은 탕에 각각 설명이 붙어있다는 점이 특이했달까. 하나씩 몸을 담가본 뒤, 문을 열고 노천탕으로 나가자 놀랄만큼 차가운 바람이 온 몸을 때렸다. 뜨끈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갑자기 밖의 공기가 닿았으니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예상 이상으로 차가운 바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데다가 수증기가 계속 올라와 불빛들이 뿌옇게 굴절되는 중에도 아무튼일본식으로 비부를 수건으로 가리고 탕을 찾아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보니 물 위로 내놓은 얼굴과 어깨는 조금 추웠지만 탕에 담근 몸의 열기가 느껴져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식는 머리카락과 어깨를 계속해서 수건을 물에 적셔 덥혀주긴 했지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몸이 나른해지다 못해 허기가 느껴지기 시작해, 몸을 닦고 밖으로 나왔다. 유가타를 걸쳐입고 호텔 방에 들어와 지갑을 챙기고, 이번에는 1층에 있는 기념품 점을 둘러보았다. 기념품점에서는 마호로바의 특색있는 기념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거의 없고, 노보리베츠 만의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아이템들도 많이 있었다. 굳이 특색을 찾자면 온천에서는 어지간하면 다 판다는 온천 만쥬정도.
그다지 살 것이 없다는 생각에 안주거리와 군것질거리를 조금 더 산 후 지하에 있는 오락실에 가 보았다. 베가장군이 올라오는 스트리트 파이
터 두더지 게임과 북두의 권 파칭코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재밌어 보이는 것이 없어 태고의 달인을 한게임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TV를 틀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보니, 스마스마 10주년 스페셜을 하고 있었다.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명장면 스페셜이라는 문구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동생이 준비한 위스키와 안주, 컵라면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오지 못한 아쉬움과 각자의 진로, 과거, 미래, 취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스마스마가 끝날 때 쯤 동생녀석이 피곤하다며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 다시 한번 호텔을 휘적휘적 걸어다녀
보았다.홋카이도의 밤은 온천호텔도 마찬가지였는지, 한국에서라면 아직 복작거릴 법한 시간인데도 호텔 복도는 썰렁했다. 사람의 기척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 흐릿한 조명의 복도를 어쩐지 쓸쓸한 기분으로 돌아다니다가, 괜시리 음료수 하나를 자판기에서 뽑아마시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나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인의 집이 아니면 아주 싼 여관이 아니면 유스호스텔이나 비지니스 호텔만을 다녀봤기 때문에, 리모콘으로 조명을 끄고 쾌적한 공기 조절장치가 돌아가는 침대에서 유가타를 입고 자는 것이 조금 신기하고 어색한 느낌이었다. 동생의 유학 덕분에 이런 곳도 와보는 구나.. 하는 감탄과, 이제 여행의 절반이 지나 곧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이 아련히 교차하는, 편안하면서도 쓸쓸한 잠자리였다. ===================================================================================================
#9 [2005년 12월 27-28일_삿포로로, 그리고 한국으로]에서 계속. 돌아온지 만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마지막회에 대한 예고를 쓰고 있다.. 으음... 아시겠지만, 그림은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다. 볼만한 사진들은 없지만.
눈발이 약해졌다가는 곧 강해지는 기세를 반복했기 때문에 좀 더 안쪽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조금 불안하고 곤란하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이동할 수는 있었다. 약사여래에 잠시 묵상을 올리고 오오유누마를 거쳐 안쪽에 있는 오쿠노유마로 향했다. 사실 오오유누마는 여름철에 가까이 가서 올라오는 수증기와 넘쳐나는 유황을 직접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가는 길이 쌓인 눈 때문에 위험한 탓인지 출입금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예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했지만, 아쉬워하는 동생의 모습에서 꽤 볼만한 풍경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할 수가 있었다.
눈 쌓인 오솔길을 따라 오쿠노유마를 향해 올라가는 길에는,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과 눈발 탓인지 되돌아 나오는 몇 명의 관광객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올라가는 사람은 나와 동생 뿐이었는데, 문득 어두워지려는 채비를 하는 하늘과 흩날리는 눈발, 눈 덮인 오솔길의 풍경이 무척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중간에 지옥곡이라고 씌여진 휴식처 같은 광장이 있었는데, 아무도 없을 뿐더러 의자와 공터가 모조리 두텁게 눈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내심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는 동생의 설명에 힘을 내기로 하고 다시 오솔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쌓인 눈 탓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수많은 산불조심 표지와 안내문들을 이정표 삼아 10여분을 오르자, 마침내 오쿠노유마에 다다를 수 있었다. 홋카이도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경치라는 동생의 자랑에 걸맞게, 정상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가진 작은 화산과 그 아래에서
김이 소용돌이쳐 오르는 온천 호수의 경치는 확실히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신기한 경치였다. 오쿠노유마도 사실 자동차까지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아래에 있고, 가까이가서 뜨거운 온천물에 탁족을 할 수 있는 곳도 있다고 했지만 도보로 내려가는 길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 위험했던 탓에 가까이 가 보지는 못하고 그저 눈과 카메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얼마나 머물렀을까, 하늘이 조금 더 어두워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고 눈발도 갑자기 격해지기 시작해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돌아오는 발걸읆을 옮겼다. 중국 속담에 가는길의 100리는 오는 길의 10리라고 했던가, 돌아나오는 길은 오를 때보다 한결 편하게 느껴졌다.
눈발을 가르며 다시 호텔가로 내려오는 길에 한 노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점심을 가볍게 빵으로 때우고, 호텔에 도착해서 먹은 만쥬와 녹차가 아침식사 이후 끼니의 전부였고 지고쿠다니를 찍고 내려오다보니 허기가 밀려오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게다. 메뉴는 홋카이도에서 꼭 먹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인 문차다 어깨부러트린 망놈...이 아니라, 징기스칸을 시켰고, 동생은 지고쿠다니 특제 냄비우동으로 골랐다.
징기스칸은 노린내가 나지 않는 양고기와 숙주나물을 볶은 일종의 불고기였다. 다른 찬 없이 간단한 야채와 쌀밥을 함께 먹었는데, 별도로 시키는 쌀밥의 가격이 결코 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밥 자체가 맛있었고 난생 처음먹어보는 징기스칸이라 그런지 우적우적 잘도 먹을 수 있었다. 동생이 시킨 냄비우동은 사실 뜨거운 돌솥우동이었지만, 뜨거운 온천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을 재현했다고 하는 아이디어 마케팅(이라곤 해도..)이 돋보이는 네이밍 센스였다. 한가하면서도 여유있게 운영한다는 느낌을 주는 가게에서 느긋하게 배를 채우고,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안주거리와 컵라면을 골라 호텔로 돌아갔다. 드디어 온천에 몸을 담글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호텔을 나와 지코쿠다니로 올라가는 길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어른들의 장난감', '누드'라는 글씨와 그림이 들어간 간판이었다. 마치 오래된 극장 간판을 연상케 하는... 홋카이도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의 호텔 근처에 이런 간판이 버젓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상당히 의아했지만, 나름대로 재밌는 광경이기도 했다. 그 옆 건물 2층에는 '모아'라는 이름의 '스낵'이 있었는데, 이 스낵이 내가 알고 있는 분식집 비스무리한 것과 전혀 다른 장소라는 것에 또 조금 놀랬다. 같은 발음인데도 이렇게 이름이 다르다니..
모아 스낵을 지나 세븐 일레븐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완만한 경사로 발걸음을 옮기자, 양편에 독특한 디자인으로 지어진 기념품점과 식당 등의 건물들이 보였다. 관광지인 만큼 당연한 것이겠지만, 건물과 입구의 장식들이 수수한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인 거리를 걸어 올라가고 있자니, 길 오른편에 거대한 염라대왕이 설치된 시설이 보였다. 뭔가 싶어서 가까이 가봤더니, 동전을 넣고 복을 비는 냄비와 100엔을 넣으면 운세가 적힌 제비가 나오는 자판기, 그리고 도깨비그림이 그려져 있는 입간판이 있었다. 설명을 읽어보니 이 염라대왕은 하루 중 정해
진 시간에 무서운 표정으로 변하며 소리를 내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걸 보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맞지 않아 멀뚱멀뚱한 얼굴의염라대왕만을 보고 왔지만. 도깨비 입간판의 얼굴 부분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거기에 얼굴을 내밀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거기서 사진을 찍고 다시 지코쿠다니를 향해 올라가자, 이번엔 좁은 삼거리에 빨간 오니와 파란 오니의 상이 놓여 있었다. 이 오니들의 기원이 케로로에서도 나왔던 그 오니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인상적인 구조물임에는 틀림없었다. 지코쿠다니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곳이니 만큼 설치해 둔 것일 수도 있겠자만. 지코쿠다니라고 씌여진 간판을 지나 점점 유황냄새가 짙어지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재촉하자 이번에는 수많은 식칼을 묻어두었다는 무덤이 나왔다.
무덤이라고 해서 봉분이 있거나 한 것이 아니라 무덤의 기원이 적혀진 석판과 비가 새워져 있는 정도였지만. 설명을 조금 읽어보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자, 드디어 지코쿠다니 입구가 보였다.
012
입구에 서서 본 지코쿠다니의 느낌은, 지옥이라는 름이 붙은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계속해서 내리는 눈 때문에 눈으로 덮인 부분이 많긴 했지만 뜨거운 지열이 올라오는 부분은 유황과 바위로 변색된 부분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는 그런 광경이었다. 지코쿠다니에 들어서는 입구 부분에서 문득 생각난 듯, 동생이 길 왼편 벽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만져보라고 알려주었다. 다른 부분은 날씨 탓에 차갑게 식어있었지만 과연 그 부분은 뒤에 지열이 지나가는 듯 따스한 온기가 나오고 있었다. 지난 여름 이곳을 다녀갔을 때 노인 가이드 분이 알려준 포인트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도, 눈이 덮여 미끄럽게 얼어붙은 부분과 지열 때문에 마른 돌바닥이 노출된 부분이 뒤섞여 있는 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길 오른편으로 약사여래 가 안치된 작은 사당이 보였다. 지코쿠다니의 공기에 섞여있는 강한 유황의 냄새가 알려주듯, 이곳에서는 엄청난 양의 천연 유황이 생산되고 있고 그것이 약사여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자그마한 약사여래 사당을 살펴보고, 문득 하늘을 보자 결코 늦은 시간이 아님에도 하늘이 어두워질 채비를 차리고 있었고 서쪽 하늘에서는 엄청난 양의 까마귀 떼가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지코쿠다니를 보러 가야 한다며 걸음을 재촉하는 동생을 따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