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습관탓에, 아침은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등교하는 습관탓인지, 동생은 조금 더 늦게 일어났지만. 현역 대학생인 것을 감안하면 꽤 성실한 아침을 맞이하는 편이기도 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동생의 솜씨로 차린 아침을 먹고, 동생이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다는 교수님께 선물로 준비해 간 유자차를 싸들고 인사를 드리러 학교로 갔다. 일요일이자 크리스마스였던 전날의 텅 빈 교정이 아닌 아침 시간을 지나가는 대학의 느낌이 살아있는 학교였다. 겨울이고 그래도 아침인 탓인지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지만. 만나뵈려 했던 교수님은 마침 자리를 비우신 탓에 결국 라운지에 유자차를 맡겨두고 목적지인 온천호텔 마호로바가 있는 노보리베츠로 출발을 했다.
마호로바라는 온천호텔은 지난 여름 동생의
지코쿠다니 여행 때 발견하고 어느정도 동경을 품었던 곳이었는데, 이번에 내가 찾아가는 시즌에 맞춰 할인된 가격에 제공되는 상품을 찾아내어 예약을 해 두었다고 한다. 삿포로 시내에서 출발해서 노보리베츠의 마호로바까지 데려다 주는 직행 버스와 1박에 다음날 아침 식사가 뷔페로 제공되며 아침 10시에 출발해서 삿포로 시내로 돌아오는 직행버스까지 토탈 1인당 5,000엔이 못되는 가격이라니 상당히 경제적이지 않은가. 당연히 투숙하는 기간동안 온천은 무제한 무료이기도 하고... 아무튼 이렇게 좋은 상품을 발견하여 지른 동생에게 감사하며, 버스가 기다리는 삿포로 시내로 나가기 위해 오오아사역에서 전차를 탔다. 출발하자마자 디카를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동생의 아파트에 돌아갔다가 나오는 헤프닝을 겪고, 아슬아슬하게 버스 출발 시간을 맞출 수가 있었다. 덕분에 조금 비싸고 조금 빠른 지하철을 타기는 했지만, 디카를 두고오는 실수를 해서 시간을 까먹은 덕분에, 점심식사는 버스 안에서 빵과 음료수로 때우게 되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상당히 빈한 식사를 한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빵 자체가 일단 내가 좋아라 하는 초코빵이었고, 그것이말 그대로 입에서 녹는 맛이었기 때문에 먹는 동안 대단히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음성 정도까지 가는 느낌으로 흐린 하늘과 맑은 하늘 사이를 번갈아가며 달려, 많은 온천호텔과 지코쿠다니가 기다리고 있는 노보리베츠에 도착하게 되었다. 노보리베츠에 들어서자, 이곳의 상징물 처럼 되어 있는 오니(도깨비)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붉은 오니상 앞에서 왼쪽길로 들어서 조금더 구불구불한 국도를 달리자 수려한 산세를 배경으로 마호로바를 비롯한 온천호텔들과 기념품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마호로바 앞에서 버스를 내려, 주변을 조금 둘러본 뒤 호텔로 들어가 체크인을 했다. 저렴한 가격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깔끔한 시설과 서비스에 감탄하며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 보니 깔끔하게 정리된 2인실 호텔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의 옷장안에는 온천을 즐기러 내려갈 때 입는 유가타가 사이즈 별로 2벌씩 3가지 사이즈가 준비되어 있었고 깔끔하고 폭신한 싱글침대 2개와 기본 셋팅에 들어가는 듯한 봉지차 몇 개와 만쥬가 놓여있었다. TV를 틀고 녹차와 만쥬를 먹으며 창밖을 보자, 쿠마목장(곰목장)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동생에게 물어보니 정말로 산의 일정 영역 안에서 곰을 키우는 목장이라고 했다. 다시 보니 케이블카를 이용해 산 정상에 올라갈 수 있고, 그 케이블카에서 곰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시설이었는데 신기하긴 했지만 그다지 가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01
온천을 즐기기 전에 지코쿠다니에 가보자는 동생의 말을 따라, 짐을 놓고 지코쿠다니를 향해 올라가기로 했다.
박물관을 나서, 다시 가라면 못 갈 것 같은 길을 구비구비 돌아 팩토리로 향했다. 삿포로 맥주 팩토리라고는 하지만 예전에 공장이 있던 터에 새로 올린 쇼핑몰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가는 도중 길가에 있던 한 절의 글귀가 재밌어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사진의 글귀는, [남의 험담은 거짓말이라도 재미가 있고 내 험담은 정말이라고 해도 화가 난다]라는 것으로, 어쩐지 최근의 네티켓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느낌이 새로웠다.
팩토리에 도착하자, 누군지 알 수 없는 가수의 어떤 행사가 진행중이었고, 밤에 보면 정말 멋질 것 같은 대형 크리스카스 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재미있는 것은, 팩토리의 입구와 통로 군데군데에 공장에서 쓰고 남은 듯한 파이프라던가 기어 등을 인테리어와 소품으로 장식해 두었다는 점이었다. 이곳이 지금은 쇼핑몰이지만 원래 삿포로의 이름을 걸고 맥주를 만들던 곳이었다는 긍지를 남겨두고 싶어 했던 것일가. 감상도 좋지만 아무래도 맥주만으로는 배가 고팠던 탓에 무엇을 먹어볼까 하다가, 회전 초밥집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초밥은 원래 아무거나 잘 먹긴 하지만 딱히 좋아하는 것은 없었는데, 동생은 계속해서 사모-서몬, 연어-만을 집어 먹는 것이 수상해서 이유를 물어보니 값도 싸지만, 홋카이도에는 연어가 많이 잡히고 또 그 맛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연어 초밥이 그래봐야 연어초밥이겠거니.. 하고 시험삼아 하나 먹어보니.... 어째서 연어에서 이런 맛이!! 라는 생각이 얼른 들 정도로 맛이 달랐다. 나는 맛을 묘사하거나 하는 데에는 재능이 없어서 뭐라 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먹었던 연어 초밥과 게 초밥의 맛은 초밥의 맛에 대한 개념의 깨부수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맛없는 초밥들만 골라 먹으러 다녔을 수도 있겠지만, 쇼핑몰에 위치한 바쁜 회전 초
밥집의 초밥에 쓰인 연어와 게(참치나 오징어도 훌륭했지만)의 질은 서울 인근에서 맛 볼 수 있는 이런 저런 초밥들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연어에 한해서 만큼은.
이럭저럭 초밥을 집어 먹고 어느정도 포만감
을 만끽하며 초밥집을 나와, 이번엔 테레비토오(테레비탑)에 가보기로 했다. - 텔레비전 탑이나 TV탑이라고 적는 것이 정상이겠
지만 굳이 테레비토오라고 적은 것은 테레비토오의 상징 캐릭터 테레비 토오상(테레비 아버지) 때문이다. 그 멋져버린 쌍판을 허접한 사진으로나마 감상해 주시길 - 초밥집을 나와 팩토리를 나오자 점심시간이 갓 지났을 뿐일 태양이 슬슬 서쪽을 향해 스퍼트를 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계를 다시 보았지만 1시가 갓 지난 시간이었는데 태양의 위치는 서울에서라면 거의 4시 정도의 위치에 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해가 질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였지만 동생이 추천하는 삿포로의 명물 테레비토오를 보기 위해 꾸역꾸역 걸어 오오도리 공원으로 향했다. 오오도리 공원은 소위 화이트 일루미네이션이 펼쳐지는, 몇 블럭에 걸친 큰 공원으로 테레비토오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테레비토오는 기념품 점과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망대는 유료인데다 낮에는 그다지 풍경이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하여 기념품점만을 둘러 보았다. 테리비토오상 캐릭터 인형과 굿즈, 홋카이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시로이 코이비토, 그리고 팬더를 패러디한 담파 및 곰 캐릭터 관련 굿즈들을 팔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폭주족 양키 곰인형이었다. 선물로는 그리 적합해 보이지 않아 사진만 찍었지만 정말 뭔가를 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인형들이었다.
테레비토오를 나와
오오도리공원을 조금 걷다보니 뭐라 형용키 힘든 형태의 우리말로 된 간판도 있었고, 한국의 닭둘기와 그 사이즈를 겨룰 법한 닭둘기들, 그리고 닭둘기를 내려다보는 까마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낮의 오오도리 공원은 그다지 볼 것이 없는 넓은 공원에 지나지 않아서, 간사이에서 보았던 남바 거리와 비슷한 구조의 타누키코오지로 가보기로 했다. 타누키코오지는 상가건물이 밀집된 거리가 몇 블럭이나 계속되는 곳으로 의류에서 가전제품까지 여러가지 종류의 상점이 밀집되어 있는 쇼핑의 거리였다. 원래 너구리가 드나드는 작은 길이라는 뜻이라던가 하는 의미와는 꽤 다른.. 그런 곳이었다.
이 곳의 타이토 직영 게임센터를 잠시 들렀다가, 최근 가동을 개시한 코나미의 드럼매니아V2, 기타프릭스V2를 동생과 함께 세션으로 즐겨보고 북두의 권 격투게임, 철권5 DR을 해 보았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많은 플레이를 하지는 않았지만 북두의 권은 사우저 플레이어 한명을 가볍게 누르고(처음 해본 게임이었고 캐릭터는 켄시로였다) 라스트 보스 라오우에서 패배, 철권5 DR은 처음 만져보는 리리로 플레이하여 몇 승 정도를 할 수 있었다. 북두의 권은 플2로 이식이 되어야 만져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철권5 DR은 이미 국내에 풀리기 시작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역시 기타도라V2에 가장 관심이 갔고, 몇 번 세션 및 솔로 플레이를 해보고 다시 게임센터를 나와 저녁에 예정된 크리스마스 파티에 쓸 KFC의 치킨과 국내에는 없는 모스버거라는 체인의 모스치킨을 사고, 홋카이도에서 본 역 들 중 가장 컸던 삿포로 역으로 가서 전차를 타고 동생의 집에 들렀다가 동생의 학교 친구 집에서 모인다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갔다.
파티라고는 하지만, 친한 친구들이 몇 명 모여서 조촐한 저녁 식사 후 가벼운 술자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나는 동생의 형이라는 입장이자 손님으로 그 자리에 끼었지만, 무척 녹슨 내 일어 말하기에 대한 미묘한 느낌과 함께 대학생들의 자그마한 술자리의 느낌이 남아 꽤나 재미있는 자리로 남았다. 커플부대의 공습을 피한다는 핑계로 도망가 일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맞아본 기독교 혐오론자의 성탄절 술자리치고는 따뜻하고 재미있는, 자그마한 파티였다.
시간은 많이 늦지는 않았지만 마침 뉴스에서 홋카이도 전역에 폭설이 휘몰아친다는 뉴스가 나와, 예정보다 조금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되었다. 갈 때도 눈은 결코 적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내린 눈의 양은 실로 경악할 만한 양이어서 발목을 훨씬 넘는 높이의 눈길을 밟으며 역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감동적일만큼 눈에 휩싸인.. 그런 조용한 성탄절 밤이었다. 역에 설치된 자그마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눈 덮인 역을 지나, 동생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왠지, 아주아주 꼬맹이적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던 시절의 나와 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기독교는 싫어하지만, 아무튼 메리 크리스마스였다.
나에보 역은 오오아사역과 같은 평범한 역이었다. 좀 신선했던 것이라고 하면 나에보역 자체 보다, 가는 길 중간중간의 벽이나 다리 교각등에 그려놓은 그래피티들. 꽤 많기도 했고, 퀄리티도 좋아보였으며 일부러 그런 것을 장려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상당히 신선한 느낌이었다. 나에보 역 자체는 평범한 작은 역이었다. 내가 들렀던 모든 역이 그렇듯이.
역을 나와, 대충 지도를 보고 동생이 방향을 잡아 10분 정도 시내를 걸었다. 육교를 하나 건너고 큰 쇼핑센터를 하나 돌아, 얼핏 오래된 교회당 건물처럼 보이는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처음 인상은, 그다지 맥주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건물이라는 느낌. 건물 앞에 오크통을 쌓아 글씨를 써넣은 구조물이 있었는데, 뒤에 설명을 듣고 안 것이지만 이것은 일본 개화기에 삿포로에 처음 맥주 공장을 세웠을 때 만들어 놓은 것을 재현한 것이란다. 당시 맥주라는 음료가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짐이랄까 광고랄까, 그런 글씨를 좀 알아보기 힘든 방향으로 적어놓았다고 한다. 글씨 중에는 현대 일본어에는 쓰지 않는 글자들도 있어서 전혀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눈 덮힌 맥주 박물관 앞에서 사진을 찍고, 안에 들어가 보니 가이드를 따라 투어를 돌면 무료 사진 인화 이벤트를 한다는 말
에 서둘러 3층에 올라가 투어에 참가했다. 예전에 교토에 갔을 때도 유스호스텔근처의 신사에 가서 설명을 듣고 놀다 오는 투어에 참가했던 기억이 있어 왠지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투어 자체는 맥주 박물관 3층에 설치된 전시물들을 한바퀴 돌면서 처음 일본의 개화기 당시 맥주를 도입한 사람들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해서 맥주가 일본에서 국민 음료로 정착하게 된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특히 삿포로 맥주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개화기 당시 얼음을 구하기 쉬운 삿포로에 공장을 세우고 맥주를 만들던 과정을 묘사한 미니어처 디오라마였는데 만드는 사람들을 전부 귀엽고 단순한 캐릭터로 만들어 두어서 친밀감을 느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삿포로 맥주의 별은 삿포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게 빛나는 북극성을 의미한다는 것도 여기서 처음 알게 되었다. 투어의 마지막에 가이드 누님에게 부탁해, 개화기 당시 독일에서 들여와 2003년에 철거했다는 거대한 맥주 가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내가 독일 제품을 취급하는 회사에 다녀서 하는 말이 아니라, 독일 사람들이 물건은 견고하게 제대로 잘 만든다. 흠흠.
3층에서 모든 관람을 마치고 나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내려오자, 삿포로 맥주의 역사와 함께 발매되었던 맥주를 비롯한 관련 상품들의 전시가 있었다. 100년도 더 전에 나온 제품들을 보존해 둔 것들도 그렇지만, 스타워즈등 시류에 영합한 컵이나 보틀 등의 관련 아이템들이 보여주는 역사와 시대상이라는 것은 가벼운 주류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맥주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넓게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2층 전시품의 마지막에 현재 삿포로 맥주에서 발매하고 있는 제품들을 보기 좋게 전시해 놓은 것을 보고 1층으로 내려오자, 기념품점과 생맥주를 파는 바가 있었다. 기념품 점은 맥주 박물관에 있는 기념품점이라고 단정짓기에는 꽤 다채로운 아이템들을 팔고 있었지만 그리 끌리는 것은 없었다. 맥주를 파는 바는, 일단 200엔 짜리 중간짜리 컵 또는 400엔 짜리 작은 컵 3종류로 구분된 쿠폰을 파는 자판기에서 쿠폰을 구입해서 바로 가져가면 바에서 바로 생맥주를 컵에 담아 맥주용 크래커 한봉지와 주는 식이었다. 뒤에 드럼매니아 혹은 기타프릭스가 한 크레딧에 200엔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메리트가 있는 가격이었다.
맥주는 그냥 삿포로 맥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발매되고 있는 여러가지 맥주 종류들 중에서 고르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나와 동생은 동생의 추천으로 200엔짜리 삿포로 클래식 한컵과(상당히 맛있다), 삿포로 흑레이블(레이블은 검은 색이지만 흑맥주는 아니다.), 에비스(장사치의 신이라는 아저씨로, 여기서는 맥주 브랜드) 흑맥주(진짜 짱 맛있다...), 개화기 당시 재현(처음 맥주를 들여왔을 때 만들던 방식을 재현하여 만든 맥주. 조금 밋밋하지만 뒷맛이 깨끗하다-이상 사진 순서대로)를 주문하여 보았다.
012
과연, 토탈 600엔이라는 가격에 비해 맥주의 맛이 매우 좋았고(캔도 맛있지만 역시 생맥주에 비할바는 아니다) 한적한 크리스마스 낮의 바의 분위기도 행복했으며 삿포로 캔 모양의 구조물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어 무척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가벼운 낮술을 맥주로 즐기며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망중한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아쉬움을 털며 점심식사를 하러 이동하기로 했다.
알람이 울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을 때, 동생은 익숙한 살림꾼처럼 일어나 TV를 켜고 밥을 하기 시작했다. 두번의 비행과 막판에 달린 피로 탓인지 나는 영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동생의 반찬 지글거리는 소리와 냄새, 그리고 아침인데도 제법 재밌는 연말 특집 방송들의 기운을 받아 못이기는 척 이부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동생의 능숙한 솜씨의 아침 식사 준비는 자취 8개월 차라기엔 지나치게 능숙했고, 밥과 김치, 미소시루와 소시지 야채볶음으로 구성된 식단과 맛은 상당히 노련한 실력을 갖추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아우여, 마침내 형을 뛰어넘었구나. 크흑. 식사를 마치고 창문을 열어 밖의 경치를 보자, 과연 눈으로 뒤덮힌 동네와 희뿌연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엄청나게 눈으로 뒤덮힌 세상을 본 것이 오랫만이랄까 생전처음이랄까, 그런 어떤 종류의 감격까지도 느껴졌다. 전방에서 군생활 하고 오신 분들은 콧방귀를 뀌실지 모르겠지만 이곳의 눈 덮힌 광경의 박력은 직접 와서 한번 보시길 바란다.
아침 설거지를 하는 동생을 뒤로 하고 B'z의 [언젠가의 메리크리스마스]를 들으며 느긋한 아침 목욕을 즐기며 못된 형 놀이를 조금 하고, 뒤이어 동생의 준비를 기다려 이윽고 계획했던 삿포로 시내 구경에 나섰다. 동생의 아파트에서 가까운 학교 교정을 통과하여 오오아사 역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눈 덮힌 학교와 동네의 분위기는 제법 외국이라는 느낌을 전해주는 풍경이었다. 아무도 없는 크리스마스 아침의 대학 교정에 쌓인 눈의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나는 예수쟁이들을 싫어하는 종자지만 실연에 한 해를 불태운 솔로이기에 그 느낌을 스스로 더 미화시킨 감은 있지만서도. 눈 덮힌 거리를 조심조심 지나 오오아사역에 도착해 보니, 조용한 시골역이라는 느낌이 드는 작은 역이었다. 그러려니 하고 일단 역근처의 은행에 들렀는데. 캐릭터 산업이 넘쳐나는 일본이라곤 해도 ATM 기계에 까지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킬 줄은 몰랐다. 그리고 삿포로 북양은행의 캐릭터들을 잠시 보고 있자니 이런 식으로 대중, 나아가 어린이들에게 은행을 친숙하게 하는 전략에 대한 고찰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느낌이었다.
잡생각을 하기에는 일정이 빡빡해, 용무를 마치고 은행을 나서 다시 오오아사 역에 들어갔는데, 올때는 보지 못했던 계단의 눈사람 장식이 인상적이었다. 잠시 후 역에 도착한 JR을 타고 몇 정거장 지나, 동생의 안내에 따라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가기 위해 '나에보 역'에서 내렸다. =========================================================================